사찰

전북 고창 도솔산 도솔암

[더 꿈] 감성인 2020. 11. 13.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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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 도솔산 도솔암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자리하고 있는

도솔암은 도솔천이라는 극락세계를 떠올릴 만큼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세운 사찰인

도솔산(선운산)에 세운 도솔암은 그 이름값을

충분히 하고 있다.

도솔암의 창건사실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시대에 선운사와 함께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선운사의 왼쪽 굴(지금의 진흥굴)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깨뜨리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감응 받아 중애사(重愛寺), 선운사, 도솔사 등의

여러 사암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부인의 이름이 중애였으며,

딸의 이름은 도솔이었다.

진흥왕 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둘러싸고

심한 대립에 있었던 때라 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다만 산과 암자의 이름을 도솔이라고 하고

미륵삼존이 꿈에 출현하였다는 것은 이곳이

미륵신앙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도솔암 마애불상이 554~598년(백제 위덕왕 재위기간)

사이에 검단 선사(黔丹禪師)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검단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검단 선사가 창건한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마애불상을 중심으로 여러 암자들이 들어섰다.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이곳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1994년 부여문화재연구소의 도솔암

인근 지역조사에서  '도솔산 중사'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돼

예전에는 중사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내원궁으로서

1511년 지은(智誾) 스님이 중창한 뒤

1694년과 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에 해인(海印)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극락보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년(숙종 29)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특히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었던 데서도 도솔암과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애불좌상이 조성된 이래 이불상의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결국 도솔암은

본래 상.하.동.서.남.북의 6도솔이 있었으나,

상.북 두 도솔암은 마애불만 남고 나머지 셋은

자취조차 희미해졌다.

상도솔암은

지장보살상이 모셔진 지금이 도솔천 내원궁이고,

하도솔암은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며,

북도솔암은 극락보전이 있는 자리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와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상.하.북. 도솔암 이 셋을 합쳐

현재는 도솔암으로 부르며, 도솔암의 전각은 극락보전,

나한전, 도솔천 내원궁, 요사 등의

전각과 마애불상으로 이루어졌다.

도솔천 내원궁에는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1200호,

나한전과 내원궁은 각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의 맞배지붕이고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천장은 우물반자이고,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모시고

좌우협시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봉안하였다.

북도솔암의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상

"兜率庵(도솔암)" 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북도솔암의 요사채이다.

도솔암이란 도솔천을 나타내는 뜻인데,

도솔천은 욕계(欲界) 6천(六天) 가운데 제4천(第四天)에

해당하는 곳이며,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고대 인도의 거리 단위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11~15㎞라는 설이 있음)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한다.

외원에서는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욕계의 제4천에 불과한 도솔천이 이렇듯

이상적인 정토로 등장하게 된 것은 미륵보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7보(七寶)와 광명(光明) 등으로 장엄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십선(十善)과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설하는 음악이 끝없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천인들은

그 소리를 듣고 자연히 보리심(菩提心)이

우러난다고 한다.

도솔천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끊임없이 정진하여 덕을 많이 쌓은 사람,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사람,
경전을 독송하는 사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보살을 염불하는 사람,

계율을 지키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은 사람,
널리 복업(福業)을 쌓은 사람,
죄를 범하고서 미륵보살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는 사람,  미륵보살의 형상을 만들어

꽃이나 향 등으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사람 등이다.

이상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상적인

불국세계로서 도솔천은 크게 부각되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0호,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 풍판을 단

건축양식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이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하도솔암에 해당한다.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였고,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도솔암은 선운사의 산내암자로서 극락보전

서쪽 150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 도솔암 용문굴에 이무기가 살면서

주민들을 괴롭혔는데,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羅漢像)을 모셔와 이곳에 안치하자 이무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보물 제1200호,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으로

이름 붙여진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

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불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층단을 이루어 비교적 높게 되어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으며,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

兜率天內院宮(도솔천내원궁)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이문은 도솔암의 일주문에 해당한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禪雲寺 兜率庵 內院宮)"은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이라고

부른다.

조선 중종 6년(1511년)과 숙종 20년(1694년),

순조 17년(1817년)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웠기 때문에 기단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잡아 원형 주춧돌만 두었다.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천장의 구조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우물천장이며,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을

모시고 있다.

보물 제280호,  "고창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

(高敞 禪雲寺 兜率庵 金銅地藏菩薩坐像)"은

청동 불상을 도금한 불상으로 도솔암에 모셔져 있다.

머리에는 두건(頭巾)을 쓰고 있는데, 고려 후기의

지장보살 그림에서 보이는 양식이다.

이 보살상은 선운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과

두건을 쓴 모습, 목걸이 장식, 차분한 가슴표현 등에서

서로 닮았지만, 이마에 두른 띠가 좁아지고 귀를

덮어내리고 있지 않으며 용모 등에서 수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지장보살은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둥근 얼굴은 단아한 인상이며,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선은 부드럽다.

상체나 하체 모두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띠를 매고 배가 들어가는 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옷은 배부분에서

띠매듭을 지었고, 다리에는 간략한 몇 가닥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왼무릎에 올린 모양으로

발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배에 들어 작은 수레바퀴

모양의 물건(보륜)을 잡고 있다.

고려 후기의 불상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이 보살상은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작품이다.

도솔암 산신각에 봉안되어 있는 2폭의 산신탱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에서 바라본 도솔산 천마봉 

도솔산 천마봉에서 바라 본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품바타령을 작사했던 송기상 시인의 시가

도솔암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 찻집 입구에서
나그네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천연기념물 제354호,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

(高敞 禪雲寺 兜率庵 長沙松) 은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굴 바로 앞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3.07m이다.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져 있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퍼져 있다.

고창 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하는데, 장사송은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장사현이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며,

진흥송은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솔암 장사송은 오랫동안 조상들의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나무의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며 보기 드물게 오래된 소나무로서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땅위 약 3.0m되는 곳에서 줄기가

여러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 소나무는 변종인 반송으로 알려지고 있다.

생육공간은 충분하고 나무를 보호하는 철책

울타리안에 장사송(長沙松)이라고 새긴 석비가

놓여 있고 비석의 뒷면에는 이 나무에 얽힌

전설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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