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설악산 백담사

[더 꿈] 감성인 2020. 11. 2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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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은둔지, 설악산 백담사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雪嶽山)에 위치한 백담사는 전임 대통령으로

인하여 잘 알려진 곳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백담사가 잘못된 정치사에 의한

대통령 유배지라는 과거로인해 전혀 다른 의미로

인식되는 절집이 되어 씁쓸한 기분이다.

 

차라리 ‘님의 침묵’으로 잘 알려진 한용운 시인이

오랫동안 속세의 인연을 끊고,

백담사에서 자연을 벗 삼아 수행하고

거처했던 곳으로 알려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하여튼 백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또한, 백담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설악산심원사사적기 ( 雪嶽山尋源寺史蹟記)」와

한용운(韓龍雲)이 편찬한

『백담사사적(百潭寺史蹟)』이 있다.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으며, 그 때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에

실화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狼川縣)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山水)가 매우 더러워졌고,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런데,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전후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여러 승려들이 합심해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 다시 불탔으므로 

승려 동훈(洞薰)과 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深源寺)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 법당과 극락전, 벽

운루(碧雲樓)를 비롯한 여러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東庵), 원명암(元明庵),

백련암(白蓮庵), 오세암(五歲庵), 봉정암(鳳頂庵) 등이

있었으며, 동훈, 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다른 장소에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여 법당을 비롯한 요사채 등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익(載益) 등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最鵬)이 다른 스님들과

인법당(因法堂)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하였다.

 

그 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1783년(정조 7)이었고, 이 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현재의 이름인 백담사는 7차에 걸친 실화가 닥쳤고,

그 때마다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나,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진

이름이라는 설을 다음의 전설로 알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화재가 있을 때마다

주지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분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지금도 이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암석이 솟아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潭]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다.

 

그래서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담자가 들었기 때문에

그 뒤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15년 겨울밤에 일어난 화재는

불상과 탱화 20여 위(位)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 범종까지도 모두 태워 버렸다.

 

당시의 주지는 사무를 오세암에서 보면서

백담사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시주받은 돈으로 1919년 4월에

법당 20칸과 화엄실 20칸을 건립하였다.

 

한용운이 『백담사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의

백담사는 복구가 끝나고 정리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이 창건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함으로써

전국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한 곳이 된

봉정암, 자장이 창건하고 관음진신을 친견했다는

관음암,

 

다섯살의 신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견성한 오세암, 유학자 김창흡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창건한 영시암(永矢庵) 등이 있다.

 

수심교(修心橋)

- 백담계곡을 가로질러 백담사로 들어가는 다리.

다리를 건너가면 바로 마주치는 금강문

금강역사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으로, 불교의 수호신이다.

금강과 같은 지혜로서 번뇌를 꺽어 없애므로

금강역사라고 하는데, 이들을 봉안해 놓은 곳이

금강문이다.

무림 김영기(霧林 金榮基)선생의 글씨인 금강문 편액.

사찰 문의 오른쪽에는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와

나라연금강이 서있다.

나라연금강은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100만배나

된다고 한다.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벌려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아금강역사라하고,

사찰 문의 왼쪽에 서있는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 한다.

사찰문의 왼쪽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밀적금강(훔금강)이 서있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쥐고 있고,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있으며,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금강문을 지나면 솟을삼문이 자리하고 있으며,

들어가는 위쪽에는 '百潭寺'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안쪽에는 산명을 적은 '雪嶽山' 편액이 걸려있다.

만해기념관 전경.

맨 뒤로 보이는 나한전과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비(詩碑)와 흉상.

'만해기념관' 편액 글씨는 석주(昔珠) 스님의 필적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 8, 15, 23대 총무원장,

불교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석주(昔珠) 스님은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동국역경원 이사장 등을 거쳤다.

여초 김응현 선생이 쓴 '만해기념관' 편액.

만해기념관 내부의 전시물 모습.

 

무림 김영기(霧林 金榮基)선생의 글씨인 범종루 편액.

卍海堂(만해당) 전경.

나한전 전경.

나한전 편액과 내부 모습.

나한전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보처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하고 그 옆으로

부처님의 제자 중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500아라한을 봉안한 법당이다.

 

원래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였으나, 온갖 번뇌를 끊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의 이치를 터득하고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인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이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백담사의 중심법당인 극락보전과 주변 모습.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극락전,

극락보전, 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정토에

가게 하는 부처이다.

무한한 진리의 빛을 상징하여 무량광불로 불리며,

도교의 불로장생 신앙과 결부되어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극락보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은 구품인의 수인이고

가사를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 모습이다.

좌우협시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로 봉안되어 있다.

경전을 보면, 아마타불의 48대원 중에서

18번째 서원은 내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반드시 극락왕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미타불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극락에

간다고 했으니 그 이유 때문에 누구나 염불할 때

아미타불을 쉽게 부르는 것 같다.

'전두환(全斗換)'과 '일해(日海)'라고 새겨진

낙관으로 보아 제12대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백담사에 은거시에 쓴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임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1년 백담사에서

은둔하고 있던 중 기존에 걸려있던 '대웅전'

편액을 떼어내고 본인이 지접 쓴 '극락보전'

편액을 걸도록 했다고 한다.

화엄실 전경.

1988년 11월23일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기간 중 일어났던 모든 과오와 비리를 시인,

대국민 사과문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연희동 자택에서 발표했다.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발표한 사과문에는

개인재산과 정치자금 139억원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씨는 오후에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집을 나와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와 1990년 12월30일까지

769일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백담사 극락보전 앞 화엄실에는 아직도

“제12대 대통령이 머물던 곳입니다”라는

현판이 자랑스레 붙어 있고, 전두환이 불경 베끼는

사진, 농사일 거드는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다.

백담사의 심장부에 전두환 미니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한편 근래에 방영된

캐이블채널 tvN ‘응답하라 1988’에서

수술 후 절에 들어간 김성균과 정봉(안재홍)이

촛불을 들고 탑돌이를 하면서 기도를 하는 모습이

나온 곳이 백담사이다.

 

백담사에 들어간 정봉은 불당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발견하고는

“TV에서 많이 나오는 그 사람 맞죠?”라고

놀라며 말을 걸었다.

그 순간 정봉은 경호원에 의해 끌려나가

웃음을 자아낸 바 있다.

백담사 종무소 건물.

근래에 세워진 요사채.

보살식당 전경.

포살식당(布薩食堂) 계사중추(癸巳仲夏)

사천제(沙泉題)라고 적힌 공양간 편액.

 

이 편액은 2013년(계사년) 5월에 '사천(沙泉)'이란

분이 쓴 글씨인데, 정확히 누구의 글인지

확인할 수 없다.

포살식당 안에 걸려 있는 '내가 나를 바라보니'라는

시(詩)는 백담사에 주석해 온 설악 무산(雪嶽 霧山)

조실 스님의 글이다.

卍海기념관.

 

귀머거리 절집 혹은 벙어리 공간이라고 해야 맞을지?

해석이 무척 궁금한 '농암장실(聾庵丈室)'

편액 글씨가 '백담다원(百潭茶園)'

편액과 함께 걸려 있다.

 

매점 건물의 출입구에 걸려 있는 '만해적선당' 편액.

산령각은 우리나라의 토속신인 산신과 호랑이를

봉안한 곳으로 산신각이라고도 한다.

 

불교에 수용되면서 사찰을 수호하는 외호신이 되여

대개 사찰의 제일 위쪽에 위치하지만,

백담사는 산령각은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극락보전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백담계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수심교(修心橋).

절 옆의 백담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들이다.

이 많은 돌탑을 쌓으면서 다들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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