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김수로왕릉

봉선생님 2020. 11. 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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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의 시조이며 금관가야의 시조능인 수로왕릉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사적 제73호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은 

원형봉토무덤으로서 봉분의 높이는 약 5m에 이르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서기 42년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구간이라 불리는

아홉 부족장과 주민들이 구지봉에 올라가

그 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에서 황금상자가 내려왔고,

그 안에는 둥근 황금알이 여섯 개 있었다.
알에서는 차례로 남자 아기가 태어났는데,

알 중에서 제일 먼저 나왔다고 해서 ‘

수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수로는 10여일 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의 왕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왕은 배를 타고 온 아유타국의 왕녀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들여 결혼하였는데,

수로왕이 우리나라 국제결혼의 효시인 셈이다.
또한 수로왕은 157년을 재위하다 죽었다라는

신화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수로왕의 무덤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숭안전, 안향각, 전사청, 제기고, 납릉정문

신도비각, 홍살문, 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

문무인석, 마양호석, 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 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을 보면,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에 대해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기 위한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힌 것으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작업을 마친 후이다. 
이 능은〈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소재지와 위치가 부합되고 있어서

수로왕릉으로서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 왕릉은 신라말의 이 지역 호족인 충지(忠至),

고려시대 양전사인 조문선(趙文善)과 관련한

기적(奇蹟)을 보였던 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80년(선조 13)에 경상도 관찰사였던 허엽이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는 왕명에 의해 능비를 세웠는데

'가락국 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지봉유설(芝峰類說)』의하면,

이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 의해

능이 도굴을 당했는데 당시에 왕이 죽으면

주위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같이 묻는

순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록에는 "광 속이 무척 넓고 두골의 크기가

구리로 만든 동이만 했다.

손발이나 사지의 뼈도 매우 컸다.

널 옆에 두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고

나이는 20세쯤 되었다.
이것을 광 밖에 내다놓았더니 금시에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 순장된 사람들일 것이다"라고 하여

순장묘일 가능성을 짚고 있다.
1878년(고종 15) 수로왕의 신위(神位)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의 현액을 내리고,

김씨·허씨 양성을 교대로 참봉을 맡게 했다.
이때 안향각(安香閣)·석양(石羊)·비각 등이

설치되었으며 

왕릉의 전면에는 가락루·연신루·회로당 등의

건물도 있다. 능역은 건물 15동 47칸,

임야 1만 5,170평이다.

(출처 : 문화재청, 브리태니커)

 

김해수로왕릉의 출입문인 평삼문으로 된

숭화문(崇化門)을 들어서면 홍살문이 나타나고,

홍살문을 지나면 중층의 가락루(駕洛樓)가

탐방객을 반긴다.

 

삼문의 가락루를 통과하면

우측에 화강암으로 방형의 시생대가 있고,

그뒤로 수로왕과 왕비의 진영을 안치한

숭정각(崇幀閣)이 자리하고 있다.

 

(시생대는 수로왕과 왕비의 춘추대제 때

진설할 시생(弑省, 돼지)의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이 의례는 제례 하루전인 음력 3월 14일과

9월 14일에 초헌관 주관하에 제집사들이

참여하여 진행된다.

제례행사가 독특하여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誕降)하여 가락국(금관가야)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199년에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시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짓고

장사를 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의 묘(墓)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일치하고 있다.

수로왕릉(납릉)의 정문에는 걸려있는

'納陵正門(납릉정문)'이라고  쓴 편액.

 맞배지붕에 평삼문의 납릉 정문으로

1792년에 세워졌다.

납릉 정문의 좌우측 화반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문(雙魚文), 파사석탑,

코끼리문양이 표현되어 있어 인도와의 교류를 나타내는

단서가 되고 있다.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가락사(駕洛史)와 숭선전사(崇善殿史)가

기록된 신도비각이다.

1885년(고종 22년)에 창건되었고,

1988년 현재 위치로 이건하고 보수하였다.

신도비 이수에는 태양문양이 있다.

숭선전(崇善殿)은 가락국 시조 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이다.

 

가락국 2대 도왕 원년(서기 199년)에 창건되어

1698년에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1792년 4칸으로 중건하였으며,

1878년에 숭선전으로 선액되면서 3칸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두 번에 걸쳐 중수되고 1973년에 보수되었으며

1987년 능 전면에서 현 이치로 이건되었다.

숭선전 우측의 작은 건물은 1824년에 건립된

안향각이다.

춘추대전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香)과 촉(燭)을

봉안하는 곳이다.

숭안전(崇安殿)은

1989년에 신축되어 2대 도왕, 3대 성왕, 4대 덕왕

5대 명왕, 6대 신왕, 7대 혜왕, 8대 장왕, 9대 숙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놓은 전각이다.

정문을 통과하면 눈 앞에 나타나는 홍살문과

저 멀리 살짝 보이는 수로왕릉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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