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밀양 무봉사

[더 꿈] 감성인 2020. 12. 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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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이 춤추며 날아와 앉은 자리에 창건된 무봉사

경남 밀양시 여행에서 필수 코스로 알려진 곳은 '영남루'다. 영남루는 진주의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불린다.

이 영남루 바로 뒤편에 또 하나의 보물을 숨겨두었는데, 그 보물이 바로 무봉사(舞鳳寺)다.

천년 세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무봉사는 소박하면서 아늑한 분위기의 절집이다.

경남 밀양시 영남루1길 16-11(내일동)에 위치한 무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밀양 최고의 명소인 영남루와 인접한 탓에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아래로는 밀양강이 흐르고, 절벽 위에는 아랑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이 있고, 계단을 올라서면 영남루와 무봉사가 있다.

또한 무봉사의 바로 인접한 곳에 박시춘 작곡가의 생가도 자리하고 있다. 무봉사는 773년(혜공왕 9) 법조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에 주석하다가 대낮에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이곳으로 날아와 앉으므로, 상서로운 성지라 생각하고 창건하였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고려의 고승 범률국사가 이 절에서 하안거를 하면서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절 이름을 무봉사로 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무봉사와 마주보고 있는 강 건너편(지금의 삼문동) 지역에는 봉황이 알을 낳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밤나무를 심어 가려 주었으며, 무봉사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범종소리를 울려 봉황을 날게 하였다고 한다.

1359년(공민왕 8) 영남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무봉암에서 무봉사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 혜징이 중건하고, 1628년(인조 6) 경의가 중창하였다.

1899년(광무 3) 경봉이 중건하고, 1942년에 중수,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종루와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493호 무봉사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박시춘 선생 생가와 영남루 뒷문 사이의 나지막한 언덕길을 지나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서 무봉사의 입구인 일주문이 등장한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일렬로 된 4개의 기둥을 세워 정면 3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고 공포는 다포식 공포이다.

일주삼칸의 일주문은 ‘법화경’에 나오는 ‘회삼귀일사상’이 깃들어 있다. 즉 부처님의 제자로서 사성제를 깨달은 성문, 12연기를 깨달은 연각, 중생의 교화를 우선하고 자신의 성불은 뒤로 미룬 보살로 나뉘어진 불교의 여러 교법을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승(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가르침)의 길로 향하게끔 한다는 사상적 의미가 담겨있다.

일주문을 지나서 몇 계단만 더 올라서면 무량문이다. 무량문 양쪽 판문에는 방문객을 내려다보는 듯한 인왕상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사찰에서는 금강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있고 해탈문이 있는데, 무봉사에서는 무봉문이 해탈문을 대신하는 문이다.

무봉문을 지나서 조금 가파른 몇 계단을 오르면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아담한 규모의 절집이지만 무봉사 아래로 펼쳐진 밀양강의 풍경은 전국의 유명한 사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멋진 풍광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은 모습의 대웅전은 무봉사의 주불전에 해당하지만, 사실은 이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비롯해 신중탱과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이 다함께 모셔져 있다.

건물의 정면에는 대웅전 편액이 걸려 있고, 측면 출입문 위에는 설법전 편액이 걸어 놓았다.

대웅전 내부의 모습.

무봉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보물 제493호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이다.

이 여래좌상은 네모진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고 둥근 편으로 가슴이 다소 움츠러들어 보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너무 두꺼워서 옷주름과 신체의 굴곡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2줄의 볼록한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고, 그 안에 덩쿨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광배의 바깥부분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광배의 앞면에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를 조각하였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표현은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과 같은 것으로 드문 예이다.단정하고 양감있는 신체표현, 간략해진 옷주름, 화려하고 복잡해진 광배의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불의 동쪽 방향으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차례대로 모셔져 있는 모습.

대웅전 동편에는 낮은 이중기단 위의 오층석탑이 있고, 1층 탑신에는 소원탑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오층탑 옆에는 아담한 4층석탑이 짝을 이루고 있어 외롭지 않다.

보호각 안에 모셔진 여섯 분의 석조지장보살입상.

불교에서는 육도의 중생들이 선업의 인연으로 천상에 태어나도 그 복이 다하면 다시 나락에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천상계에도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 있다.

그리고 인간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는 지장보살, 아수라계의 중생들을 제도하는 지장보살, 축생계의 중생들을 제도하는 지장보살, 아귀계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 지옥계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지장보살 등 여섯 분의 지장보살을 모셔놓은 특별한 전각이다.

절의 동편에는 무봉사라고 적힌 편액이 걸린 또 다른 문이 세워져 있다.

판문에 그려진 밀적금강역사의 모습.

나라연금강역사의 모습.

절 마당에서 바라본 밀양강과 아파트촌이 함께 어울어진 아름다운 모습.

석조약사여래좌상.

'아동산무봉사(衙東山舞鳳寺)'라고 적힌 편액이 걸린 종무소 건물과 대웅전 전경.

범종각 - 촘촘한 창살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범종이 왠지 안스럽게 느껴진다.

무봉사의 태극나비 설화
무봉사에는 태극나비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온다. 통일신라 말기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가 전쟁에 휩싸였을 때의 일이다.

한 무리의 나비가 무봉사가 있는 아동산을 날아다니다 사라져버린 후 고려가 세워지고 통일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가끔 태극나비가 나타나면 나라에 경사가 생겼다고 한다.이 나비의 날개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태극나비라 부르게 되었고, 이후 사람들은 무봉사를 참배하고 나면,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고 전해져 태극나비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

2020/11/02 - 봉정사 영산암

 

봉정사 영산암

사랑방같은 느낌을 주는 절집, 봉정사 영산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봉정사길 222) 천등산 자락에 위치한 봉정사의 부속 암자인 영산암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빛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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