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재약산 표충사

[더 꿈] 감성인 2020. 12. 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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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약산 표충사

표충사(表忠寺)를 품고 있는 재약산(載藥山)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께서 승병을 훈련시키며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본산이다.

또한 한국 최고의 명의 허준에게 스승인 유의태가 자신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선물하며 더욱 깊은 의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표충사는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경내에 서원을 건립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경내에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서원이 있는 것이 바로 표충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 흥덕왕의 셋째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을 찾던 중 영정약수로 치유하자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정약수는 아직도 표충사를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해소해주는 감로수로서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원효대사가 창건할 당시 표충사는 죽림사로 불렀으며, 흥덕왕때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부르다가, 조선 헌종 때 청허 사명 기허 대사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오면서 표충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표충사(表忠寺)는 원래 신라의 고찰인 영정사(靈井寺)로 창건되었으며, 조선말기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의 의승대장(義僧大將)인 서산(西山)ㆍ사명(四溟)ㆍ기허(騎虛) 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表忠書院)을 사찰 안에 둠으로써 표충사로 부르게 되었다.

절에 전해져 오는 『재약산영정사고적(載藥山靈井寺古蹟)』에 의하면 사찰의 창건은 829년(신라 흥덕왕 4년)의 일이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흥덕왕 4년경) 한 서역의 승려가 이 고장에 왔는데, 사람들은 그를 황발선인(黃髮仙人)이라 하였다. 당시 이곳사람으로 고질병을 앓는 이가 있어 병을 고칠 방도를 스님에게 가르쳐주길 빌었던 바, 한 샘물을 가리키며 물을 마시라고 하였다.

이에 그 물을 마시자 씻은 듯이 병이 나았고, 이러한 영험에 탄복한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앞 다투어 희사함으로써 웅장한 절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산명을 재약(載藥), 사명을 영정(靈井)이라 했다.

” 또한 1857년(철종 8년)에 구봉(九鳳) 스님이 조선 영조 때 남붕(南鵬) 스님이 지은 『태허록(太虛錄)』을 인용하여 기록한 창건연기에는, 신라의 태자가 병으로 이곳 산중에 들어와 어느 노선사에게 약을 구했는데,

근처에 있는 샘물을 마시도록 하므로 그대로 따랐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는지라 부왕(父王)에게 아뢰어 그 선인을 위해 이곳에 절을 짓고 '재약산영정사'라 했다는 일설도 있다.

그 뒤 889년(신라 진성여왕 3년)에는 보우국사(普佑國師)가 이곳에 500여 대중을 거느리고 선풍을 크게 떨쳤으며, 1067년(고려 문종 21년)에는 해린국사(海麟國師)가 머물렀다.

1286년(고려 충렬왕 12년) 해린국사의 법맥을 이은 일연선사(一然禪師)가 1천여 대중을 거느리고 선풍을 크게 떨치니, 국왕이 이곳을 친히 방문하여 '일국지명산(一國之名山)이요 동방제일선찰(東方第一禪刹)'이라 명명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절에는 많은 고승대덕들이 번갈아 주석하면서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절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후 1610년(광해군 2년)에 혜등(慧燈) 스님에 의해 금당이 건립되고, 그 뒤에 법당 및 요사ㆍ문루(門樓)들까지 재건하여, 1669년(현종 10년)에는 제일선찰(第一禪刹)로서의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1679년(숙종 5년)에 화재를 만나 법당과 명부전ㆍ선방 등 일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인 1680년(숙종 6년)에 탄영(坦英) 스님이 법당을 중건하고, 1681년(숙종 7년)에 도한(道閑) 스님을 비롯해 신일(信日)ㆍ계화(戒和) 스님 등이 합심하여 명부전을 중건하는 등 많은 건물들의 신축과 보수도 함께 이어져 가람은 더 크게 확장되었다.

바로 이 무렵이 영정사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시기인데 8법당(法堂)ㆍ4지전(持殿)ㆍ17선방(禪房)에 이르는 많은 건물들과 15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고 한다. 또한 사찰의 재정도 비교적 풍부하여 당시 사찰에서 큰 대나무밭을 소유함으로써 관죽전(官竹田)으로 지정받아 대나무를 생산하여 관청에 바쳤으며, 이로 인해 죽림사(竹林寺)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하였다.

불교가 쇠퇴한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사찰의 재정도 점차 피폐해지고 많았던 스님들 또한 흩어져 퇴락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39년(헌종 5년)에 사명대사의 8세손인 월파(月波) 스님이 표충사(表忠祠)를 이곳으로 옮겨와, 사당의 이름을 표충서원(表忠書院)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영정사에서 표충사로 고치면서 다시 한번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근세에 와서는 1926년에 화재로 경내의 모든 건물과 시설이 전소되었는데, 오직 응진전만이 무사하였고 표충서원의 강당이었던 의중당(義重堂) 건물은 내부가 그슬린 채 겨우 보존되었다.

1927년부터 소진된 사찰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경내의 여러 불전들을 차례로 재건하고, 1929년에는 주불전인 대광전을 복원함으로써 사찰을 일신하였다. 

1960년대부터는 경내의 정화를 위해 주력하였는데, 특히 1975년에서 1982년까지 여러 차례 국가의 보조를 받아 사명대사 유물 보존관의 신설과 사찰 진입로의 개설, 의중당 건물의 이건과 표충서원ㆍ서래각 등의 중수공사가 있었다.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일주문이다.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하는 이 문은 사찰로 들어 가는 첫 번째 문으로 최근에 지어졌으며, 다듬돌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겹처마에 맞배지붕이고,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영사각(靈思閣)은 일주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길가에 있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모두 6기의 목비(木碑)가 있다.

이 비들은 표충사의 여러 고승들과 표충사에 공헌한 인물들을 기리는 공덕비(功德碑)와 불망비(不忘碑)들이다.

모두 1855년에서 1861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태허남붕(太虛南鵬) 스님과 월파천유(月坡天有) 스님, 그 당시 밀양부사였던 심의복(沈宜復), 경상감사였던 심경택(沈敬澤) 등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영사각을 지나 수충루로 들어서기 지전에 위치하고 있는 가람각(伽藍閣)은 죽은 자의 영혼인 영가(靈駕)가 경내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때를 벗는 목욕을 하게 된다.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종교적 건물이다. 

최근에 건립한 표충사의 수충루(酬忠樓)는 2층 건물로 누각 아래에 문을 설치하여 진입공간을 마련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루(樓)의 중앙 칸에는 ‘표충사(表忠寺)’ 편액을 걸고, 좌우 칸에는 ‘수충루(酬忠樓)’와 '천황제일루(天皇第一樓)’라는 현액을 걸려 있다.

수충루를 지나면, 바로 왼편에 있는 가람각으로 건물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매우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나무가람수호신위(南無伽藍守護神位)’란 목패(木牌)가 봉안되어 있다.

최근에 새로 지은 의중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의중당(義重堂)'ㆍ‘무설전(無說殿)’ㆍ‘설법전(說法殿)’ㆍ‘대흥불법도량(大興佛法道場)’의 편액을 함께 걸고 있으며 법회를 보는 장소이다.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表忠祠)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영규)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근래에 새로 건립된 유물관은 국보 제75호인 표충사금동함은향완을 비롯하여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및 사명대사가 입었던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을 비롯해 평소에 모시고 다녔다는 원불(願佛), 선조임금이 하사하였다는 패도(佩刀)와 여러 종류의 사령문서들이 전시되고 있다.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찰(寺刹)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목조사천왕상과 함께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만일루(萬日樓)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의 건물이다. 1860년(철종 11년)에 월암선사가 아미타불의 48대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의 전각을 세워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무량수각(無量壽閣) 또는 서래각(西來閣)이라 하였다.

이 전각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여 정진하던 곳으로 1926년 큰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929년에 중건되었고 현재 보수공사 중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한 효봉대종사가 말년을 보내다 1963년 이곳에서 열반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되었으며, 이곳에 걸고 있는 ‘서래각’ㆍ‘무량수각’ 등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1810~1884)의 글씨이다.

만일루는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홍원전(大弘願殿)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일반인들을 위한 시민선방이다. 대홍원전 옆에는 죽원정사(竹園精舍) 편액이 걸려 있는 건물이 같이 붙어 있다.

대홍원전(大弘願殿) 내부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는데, 후불탱은 1882년(고종 19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다.

'표충사 삼층석탑(三層石塔)'은 대홍원전(大弘願殿)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탑의 기단이 단층인 점과 상륜부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기단은 2단으로 된 6매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4매의 판석으로 갑석(甲石)을 짠 단층기단이며,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하나씩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체 부분인 탑신(塔身)과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탑신이 다소 큰 느낌이 있다.

탑신에는 넓은 우주를 모각하였을 뿐 아무런 조식을 더하지 않았으며, 옥개석은 비교적 얇은 편으로 밑에 4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하였다.

또한 각 층의 옥개석이 만나는 모서리에는 작은 풍탁(風鐸)을 달 수 있는 구멍이 마련되어 있다.

상륜부는 밑에서부터 노반(露盤)ㆍ복발(覆鉢)ㆍ앙화(仰花)ㆍ보륜(寶輪)ㆍ수연(水煙) 등을 차례로 올리고 그 위에 찰주(擦柱)를 세웠는데, 이 부재들 중에는 후대에 보충된 것도 섞여 있는 듯 하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단층이라는 점과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인 점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탑 앞에 놓인 석등 또한 이와 비슷한 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최근 석탑의 해체수리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은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물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각(影閣)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내부에는 아미타후불탱과 함께 표충사를 빛낸 역대 조사스님들과 중창주 등 22분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표충사(表忠祠)에 봉안되어 있는 사명대사ㆍ서산대사ㆍ기허대사의 영정과 함께 모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인 응진전(應眞殿)은 1926년의 화재를 모면한 유일한 전각이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건립되어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불ㆍ미륵보살ㆍ제화갈라보살의 석조석가삼존상을 모시고, 그 좌우에는 16나한상과 범천, 제석상 및 사자상을 봉안하였는데 이 상들 역시 석조로 조성되었다.

팔상전(八相殿)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옮긴 것이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충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전(大光殿)은 1926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된 것이다.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바르게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활주를 세워놓았다.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의 다포식이며, 정면 5칸 모두가 빗살문으로 가운데 3칸은 사분합의 문을, 양쪽 2칸에는 이분합의 문을 달았는데, 들어올려 차양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뒷면 5칸이 모두 벽이 아닌 창호로 마감된 점이 이채로우며, 내부에는 전각의 명칭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야 하는데, 석가ㆍ약사ㆍ아미타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세불은 모두 목불(木佛)로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고 허리가 짧아 매우 근엄하게 보이며, 17세기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중에 전하는 바로는 대광전이 중건될 때 사천의 도솔암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대광전 건물의 지붕 위 용마루 중앙에는 찰간대가 있다. 원래 찰간대는 큰 절 앞에 세우는 깃대와 비슷한 물건으로, 나무나 쇠로 만든다.

이 찰간대는 예전에 덕이 높은 승려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대광전은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각의 명칭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야 하는데, 석가ㆍ약사ㆍ아미타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있다. 대광전(大光殿)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의 글씨이다.

호는 해강(海岡),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다.

대광전 추녀마루의 잡상들

대광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 조각

대광전을 중심으로 좌측면 벽에 그린 벽화 가운데 깊은 산속을 자동차가 달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1929년에 대광전을 중건하면서 당시 풍속을 반영한 것이라 하지만, 이 시기에는 자동차란 존재를 의식하고 벽화에 그렸다는 것은 대단한 발상이다.

대광전 외벽에 그려진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이다. 험난한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향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모습은 앞은 용머리(龍頭), 뒤는 용꼬리(龍尾)로 나타내었고, 앞과 뒤에는 인로왕보살과 지장보살이 합장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차안의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배이다. 반야(般若)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를 의미하고 용선(龍船)은 용으로 극락세계로 가는 배를 상징한다.

범종루(梵鍾樓)는 2층 누각으로 건물양식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층에는 ‘구국충혼대성종(救國忠魂大聖鍾)’이라 부르는 범종을 중앙에 걸고, 2층에는 운판ㆍ법고ㆍ목어를 걸어 놓았다.

대광전과 서로 마주하여 자리잡은 우화루(雨
樓)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 중심법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독성전ㆍ산령각(獨聖殿ㆍ山靈閣)은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아담한 규모이다. 전면 두 칸에는 ‘독성전’과 ‘산신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법당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된 석조나반존자상과 독성탱ㆍ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

신라시대 흥덕왕의 셋째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을 찾던 중 영정약수로 치유하자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영정약수는 지금도 표충사를 찾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감로수이다.

관음전(觀音殿)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40년에 건립되었다. 내부에는 최근에 금동으로 조성한 42수 관음보살상을 모시고, 좌우 보처로는 목조 남순동자상(南巡童子像)과 해상용왕상이 있다. 후불탱화로는 천수천안관음보살탱(千手千眼觀音菩薩幀)을 봉안하였다.

명부전(冥府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9년에 복원하였고, 1989년에 중수한 것이다.

법당의 내부에는 불단 중앙에 목조지장보살좌상을 본존으로 석조도명존자입상과 무독귀왕입상이 협시로 있으며, 그 좌우에는 석조시왕상과 기타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상 뒤로는 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1858년에 조성된 것이다. 명부전은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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